내 생애 뜨거웠던 날들에 대한 회상
대학교 3학년 딸 아이가 오늘도 늦습니다.
요즘 딸아이의 귀가는 아주 상습적으로 늦습니다.
좀 늦어요라고 문자를 날리고는 12시 임박해서야 들어옵니다.
넘 늦게 들어온다고 세상이 얼마나 험난데 하면서
야단을 치지만 약발은 하루도 채 가질 않습니다.
오지랖이 넓다보니 하는일이 많아서 그렇다는 걸 알지만서도
부모인지라 또 한소리 집고 넘어갑니다.
잔소리 없이 지내면 좀 좋으련만 그게 아이들 키우면서 쉽지가 않습니다.
다 아이들 잘 되라는 뜻이지만 아이들에게는 그게 먹혀 들어가질 않지요.
제발 엄마의 잔소리가 더 이상 잔소리가 아님을 알아줬음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워낙에 활동량이 많아서 하루라도 집에 있는 날이 없는 딸인지라
어쩔땐 지쳐 있으면 도리어 걱정이 됩니다.
어디 아픈거 아냐?
그러면서 응원합니다.
젊다는것은 좋다.무엇이든 할수 있는 가능성이 있잖니?
늘 바쁜 딸 왜 그리도 바쁠까?했더니 저보고 하는 말이 가관이네요.
엄마를 닮았다고,
딱히 그 말에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어쩌면 가까이서 엄마를 제대로 들여다보고 어느 사이 엄마를 닮은거지요.
아휴 힘들다 하면서 가방 내려 놓으면 하루라도 좀 쉬지 그러냐는 딸아이 말에
하루라도 쉬면 안될것 같아서 늘 열심히 뛴다고 대답했던 적이 있었거든요.
딸 아이의 활동적인 모습을 보면서 시계추를 돌려보았습니다.
나의 뜨거웠던 날들에 대한 회상이랄까요?
우리 딸 아이만할 때 쯤으로 시간을 되돌리니 갓 20살
겁없이 정말로 뜨겁게 살았던 날들입니다.
시골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목포로 대학을 갔습니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시골서 학교를 다녔던터라 대학갈 엄두를 못낼 형편이었지요.
고3 수험생으로 공부를 하긴 했지만 대학은 꿈이었지만 불가능한 꿈처럼 보였습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공부는 해야했지요.
대학학력고사도 보고 야간대정치외교과를 넣었습니다.
고배를 마셨지요.
그리고 고향근처의 국립대학을 지원했습니다.
합격하고도 참담했지요.
등록금 마련이 걱정이었습니다.
물론 대학가겠다고 노나매기로 받아둔 삯을 고스란히 저축했지만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습니다.
합격하고 보니 남들 가는 대학 저도 가고싶었습니다.
주위친척들이 부모도 없는데 무슨 대학가냐는 소리를 듣고보니 오기로 더 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가지고 있던 돈으로 가감히 등록을 했지요.
그리고 목포로 가서 육촌 조카가 사는 자치집에 얹혀 살았습니다.
부지런히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았지요.
같은과 동기가 갈비집서빙 알바를 소개시켜주었습니다.
자치집서 가까워서 좋았습니다.무엇보다 저녁식사한끼 해결되는게 더 좋았다고나 할까요?
낮엔 학교에서 밤에 갈비집서 서빙을 했습니다.유난히 손님이 많은 식당인지라 할일이 참 많았습니다.
어쩔땐 집에 오면 12시가 되기도 했지요
잠든 조카 깰까봐 살금살금 들어가서 잠을 자면 바로 골아 떨어졌습니다.
하루를 시작하면 하루가 금방 그러니 한달도 금방갔지요.
대학생인지라 공부도 소홀히 할수 없었지요.
시험기간에는 잠을 줄여가며 공부하고 알바를 했습니다.
솔직히 늘 잠이 부족했다는 표현이 맞겠지요.
그때 광주에서 대학다니는 친구와 힘든 저를 위해 자주 목포로 왔습니다.
불도 켜지지 않은 자취집서 절 많이 기다려주었고 제겐 위안이 되었습니다.
축쳐진 어깨 안고 귀가하는 절 보고 많이 울어주기도 한 친구지요.
기차길 옆 자취집인지라 여름밤이면 늦도록 기찻길에서 도란도란 얘기꽃을 피웠습니다.
젊어서 그랬던지 그때는 피곤한줄 몰랐습니다.어쩌면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였지요.등록금과 생활비를 직접 벌어야하니 그렇게 열심히 할수밖에 없었습니다.
동아리 활동은 꿈에도 못했지요.
학보사에 원고모집하는 글을 보고 수필에 응모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학보사에 있던 과 친구가 학보사에 와서 일 같이 하자고 했는데
제가 거절했습니다.알바해서 돈을 벌어야했기 때문이지요.
그 뒤로 제과점 알바 과외 카페서빙등 많은 알바를 했습니다.
방학이면 농협에서 군청에서 알바를 했지요.
내 젊은 날을 알바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장학금받고 어찌어찌해서 대학4년 무사히 마쳤습니다.
참으로 눈물나게 뜨겁게 살았던 4년이지요.
무언가 열심히 했던 것은 분명한데 한쪽이 또 허전해옴을 느꼈습니다.
대학생활의 낭만을 남처럼 즐기지 못한것이지요.
미팅은 고작 두번 정도 했습니다.두고두고 후회스런 것은 동아리 활동을 못한 것이지요.
엄마의 한을 딸아이에게 풀려는 심술 한번 들어보실래요.
엄마 엄마는 어찌 대학생활 했어? 동아리는 ?미팅은?
알바로 채워진 대학생활인지라 할 얘기가 짧았습니다.그래서 제가 딸에게 강조하는것 하나가 바로 대학생활을 즐기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있다는게 뭔가요?든든한 버팀목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늘상 달고 다니는 말
"딸 대학 생활을 즐겨라.미팅도 하고 연애도 하고 동아리 활동도 하고"
제 한을 풀어주려고 그럴까요?
우리딸 대학가서부터 줄곧 바쁩니다.
연애하랴 공부하랴 동아리하랴
남자친구 둘을 군대보냈으면 연애도 잘하고 있지요.
대학 4년 장학금 받고 다니니 공부도 잘하죠.
단 두사람이었다는 gmp영어 동아리 회장으로서 회원 12명까지 늘렸으니 동아리 활동도 잘하죠?
동아리 활동 잘 해서 우수 동아리로 뽑혀 지원금도 받았대요.
작년 동아리 발표회때 제가 발표회 현장에 갔습니다.
젊음을 송두리째 느껴보려는 것도 있지만 딸아이에게 힘을 실어주려구요.
발표회 보고 금일봉 전하고 왔답니다.
확실히 제 소원을 풀어주는 딸
그렇게 열심히 사는데 결코 나무랄수는 없지요.
제가 늘 강조하는 것은 젊음은 한때다 입니다.
다시 오기 어려운 젊은날 뜨겁게 살라 말합니다.
제 젊은날은 일속에 파묻혔지만 딸만은 그길을 가지 않기를 염원하면서
오늘도 분주한 딸을 응원합니다.
딸아
초록이 짙어간다.저 싱싱한 잎사귀처럼 너의 젊은날을 즐기려무나!
20여년전 뜨겁게 살았던 날들
되돌아보니 지금 그렇게 하라면 절대 할수 없을듯 싶네요.
젊은날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더라구요.
뜨거운 날들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뜨겁기 매한가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