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3
평일이고 더운날씨가 이유일까? 옛길에서 사람만나기가 쉽지 않다.옛길엔 송두리째 우리 일행만 온듯한 착각이 들었다.어떤 역사길이 펼쳐질지 호기심 만땅으로 들어섰다.차마 이런곳에 사람이 살까 싶은데 사람의 흔적이 묻어난 민가가 보인다.녹이 슬어서 세월의 무상함을 고스란히 묻어나게 하는 입간판이 아니었다면 놓치기 쉬운 역사길중의 하나다.사촌 김윤제의 재실이란다.그냥 갈수가 없다.
그 민가야 여늬 산골의 살림살이 그 모양이어서 별 호기심은 없었지만 그 민가와는 사뭇 다른 솟을대문의 근사한 분위기에 발길이 끌렸다.재실이야 불러봐도 볼게 없다.오래도록 관리를 안 한 때문이지 여기저기 거미줄이 눈에 띠고 문들은 열쇠로 꼭 잠겼다.마당을 휘돌아 뒤안까지 가보아도 눈에 띠는게 없다.문 틈새로 안을 들여다 볼 엄두를 못내고 바로 내려왔다.바로 계곡과 숲길 그 가운데 섰다.어디로 가야하는지 잠시 숲에서 미아가 될뻔 했는데 산행 경험이 많은 일행의 선택을 계곡을 택했다.나뭇가지에 매달린 형형색색의 산악회가 길위에 소리없는 이정표가 된것이다.계곡쪽을 택하고보니 산악회 꼬리표가 즐비하다.
한낮 더위는 그 누구도 못말릴듯 싶으니 발 담그는 유혹도 만만찮다.너른바위까지 마련된 바에야 쉬어감이 정상일듯 싶었다.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시원한 물에 발 담그고 보니 시장기가 갑작스레 몰려들었다.
발 담근채로 김밥과 과일을 먹고보니 신선 놀음이 따로 없다.
물 흐르는 소리 바람소리 새소리
자연의 소리는 모두다 들려오는 곳이다.오래 머물면 좋으련만 갈길이 먼지라 망중한의 여유은 잠시로 만족하고 일어섰다.오솔길 따라 걸으니 정자 하나 우뚝 섰다.풍암정이다.정자 앞 계곡엔 물이 찰랑 찰랑
50대 중반의 아저씨들이 더위를 식히기 안성맞춤인듯 싶었다.가을 단풍이 든 모습이 바위가 감싼 물에 비추면 가히 장관이라는 곳 잠깐이라도 엉덩이를 부힐수 없다."풍광 좋네 담에오리니"맘 다짐만 하고 발걸음을 재촉한다.형 김덕령 의병장이 무고하게 젊은나이에 옥사한 걸보고 세상을 등지려 이곳에 둥지를 틀었던 김덕보의 호가 풍암이기도 하다.아마도 정자에 걸린 편액엔 당대의 풍류객들이 써 놓은 좋은 글귀들이 풍류를 읊어쓰련만 그 곳에 선 현대인은 그 풍류의 참 뜻은 모르고 그냥 지나치고 만다.짧은 한자가 원망스럽기는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풍암정 근처는 계곡이 좋아서 사람들 손길이 많이 닿는 곳임이 분명하다.저만치 태산처럼 쌓인 쓰레기가 그걸 대변하고 있다.이 더위에 자연이 인간들에게 시원함을 제공하고 기껏 받은게 저게 전부인가 싶어 씁쓸하다.자연을 자연스럽게 표나지 않게 즐기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할 듯 싶었다.포장된 농로 길로 들어서니 한낮의 지열은 반갑지 않게 확 달겨든다.엊그제 모내기한 모들은 훌쩍 커서 벌써 이삭을 패고 있었다.모두에게 다 좋을수 없는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인가 보다.인간들은 덥다고 아우성이었지만 그 땡볕에 곡식들은 들판에서 그렇게 영글고 있는 것이 확연히 눈에 띠었다.아담한 분청사기 전시실에 들러 정겨운 그릇들을 들여다보는 재미도 쏠쏠하다.화려하지도 그렇다고 초라하지도 않은 분청사기다. 차가 쌩쌩 달리는 도로를 잠시 걷고 마을로 접어든다.휴경지인지 도로근처엔 잡초들이 무성하다.그 잡초들 사이를 돌아 마을 뒷산으로 오르니 끝이 보인다.흰구름 두둥실 떠 있는 하늘도 감상하고 다리쉼도 하는 소나무 한그루의 덕을 여간 본곳이 아니다.
딸랑 그 들판에 소나무 한그루 어쩜 그리 당당히 버티고 서 있는지
그 길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에겐 영낙없이 무언의 쉼 공간 노릇을 톡톡히 했을듯 싶은 곳이다.
여름엔 역시나 나무그늘과 다리밑이 최고의 휴식공간임엔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듯 싶다.